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과우(寡尤). 호는 호봉(壺峰). 부사 율의 아들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유희춘(柳希春)과 노수신(盧守愼)의 문하에도 출입한 바 있다.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과 정언 등을 지냈다. 젊어서는 언관으로 서인을 공격하는 데에 앞장섰다. 1589년 기축옥사 때 정여립(鄭汝立)과 연루되어 부교리에서 면직되었다. 그뒤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나 1592년에 삭직되었고, 1596년 동면순검사(東面巡檢使)로 다시 등용된 뒤 대사간,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일찍이 불교를 배척하여 승 보우(普雨)를 죽일 것을 건의하였으며, 또 동면순검사로 재직할 때에는 인력이 부족한 겨울철에 수성책으로서 성벽에 물을 부어 얼리는 계책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함경도관찰사가 되어서는 오랑캐의 동정에 각별한 유의를 하고 휘하 수령들을적절히 장악한 듯하나 여러번 간관들의 탄핵을 받았다. 실록의 사평(史評)에는 위인이 흉활(兇猾)하고 탐비(貪鄙)하며 음패(淫悖)스러운 행실이 많아 사인(士人)으로서 교양 있는 사람은 더불어 교제하는 것을 수치로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선조의 특별한 신임을 얻어 이조판서 까지 역임하였다. 여색을 가까이 하였다고 하며 경상(卿相)으로서 '속어면순 續禦眠楯'과 같은 야담집에까지 이름이 올랐다. 임진왜란과 그뒤의 어려운 시기에 양사의 장을 역임하면서 당쟁의 선봉이 되었다가 광해군 초년에 축출되었다. 저서로 '성학지남 聖學指南'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