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임회(林檜)
  • 평택임씨(平澤林氏),  출생~사망 : 1562 ~ 162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공직(公直). 호는 관해(觀海). 증좌승지 정수(貞秀)의 아들이며, 중부(仲父) 길수(吉秀)에게 입양되었다. 정철(鄭澈)의 문인이자 사위이다. 1611년(광해군 3) 50세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이 되었으나 대북파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에게 모함을 당하여 곧 사직하였다. 1613년 다시 전적에 기용되었으나 이듬해 정인홍의 무함으로 임서(林○), 정기룡(鄭起龍)과 함께 왕의 친국을 받은 뒤 양산에 유배되고, 아들 득붕(得朋)은 곤양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대북파가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예조정랑에 복직되었으며, 군기시첨정을 거쳐 이조판서 겸 대제학 신흠(申欽)의 추천으로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어 남한산성의 수축을 독려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도성을 침범하므로 박영서(朴永緖), 마우현(馬佑賢)과 함께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다가 경안역(慶安驛)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일찍이 1582년(선조 15) 성균관에 입학한 뒤 생모 이씨, 생부와 양부의 상을 차례로 당하였으며, 1593년(선조 26) 양모 노씨(魯氏)의 상을 당하여 집상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벼슬길이 늦었다. 좌승지에 추증되고 전라남도 나주의 정렬사(旌烈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