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송응개(宋應漑)
  • 은진송씨(恩津宋氏),  출생~사망 : ? ~ 158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공부(公溥). 우참찬 기수(麒壽)의 아들이다. 1565년(명종 20) 홍문관정자, 저작을 거쳐서 홍문관박사, 홍문관부수찬, 사간원정언을 지내고, 예조정랑으로 '명종실록' 찬수에 참여하였다. 1570년(선조 3) 교리가 된 뒤, 1573년 함경도에 재상어사(災傷御史)로 파견되었다. 이때 덕원부사 안상(安○) 등이 무죄인데 파직시켰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같은해 6월 장령이 되고, 시강관, 부응교, 부교리, 사간, 집의, 응교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579년 승지로서 소위 이수(李銖)의 옥사에서 이를 석방하라는 왕의 명령을 철회할 것을 청하다가 다시 파직당하였다. 1583년 대사간이 된 뒤 동, 서의 분당 이후에는 동인의 중진으로서 활약하였다. 이때 헌납 유영경(柳永慶), 정언 정숙남(鄭淑男), 도승지 박근원(朴謹元), 전적 허봉(許○)과 함께 이이(李珥)를 탄핵하다가 장흥부사로 좌천되고, 다시 회령에 유배되었다. 강계, 갑산에 귀양간 박근원, 허봉과 아울러 세상에서 이들을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 하였다. 이때 조헌(趙憲)을 비롯하여 전라도, 해주 등지의 유생들로부터 맹렬한 배척을 받았다. 1585년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의 상소로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