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계응(季膺). 조부는 공신(功臣) 신덕룡(辛德龍)이고, 부친은 참봉(參奉) 이었던 신율(辛慄)이다. 경주에서 살았으며, 1603년(선조 36)에 등과(登科)하였고, 1615년(광해군 7)에 익사원종공신(翼社原從功臣) 2등에, 1623년(인조 1)에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1624년(인조 2)에 공신으로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1626년(인조 4)에 풍천도호부사(豊川都護府使)가 되어 치적(治績)을 잘하여 풍천군민(豊川郡民)이 그를 추사(追思)하여 동비(銅碑)를 세웠다. 1631년(인조 9)에 은율현감(殷栗縣監), 1632년(인조 10)에 해주병마절제사를 역임했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창의(倡義)하여 적군(敵軍)과 싸우는 등의 공을 세워 호종원종공신(扈從原從功臣)으로 녹선되고 노비를 하사 받았다. 더불어 임금은 그의 공을 치하하여 '의(義)를 잡고 있는 힘을 다하여 신하로써 충절을 나타냈으니, 어진 이의 공적을 기록한 것은 국가가 힘써 표창할 일이다'라는 글을 내리고, 그 신위를 부조(不○)하도록 명하였다. 묘는 경상북도 영일군 기계면 대곡리 고통곡(古通谷)에 있다. 신도비(神道碑)는 성균관관장(成均館館長) 권중해(權重海)가 찬(撰)했는데 그 내용이 문무(文武)를 겸비하였으며 재주가 많고 충(忠)이 뛰어나다고 기록(記錄)되어 있다. 경기도 여주군에는 부조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