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박응복(朴應福)
  • 반남박씨(潘南朴氏),  출생~사망 : 1530 ~ 159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경중(慶仲). 호는 졸헌(拙軒). 사간(司諫) 소(紹)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사부(士俯)의 딸이다. 5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7세부터 유조순(柳祖詢), 성제원(成悌元), 이중호(李仲虎) 등에게서 배웠다.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 1564년에 식년문과 을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저작, 춘추관 봉교, 전적, 감찰, 예조좌랑, 병조좌랑, 정언, 지평, 헌납, 장령, 사간, 집의, 성균관사예, 성균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동서분당이 되어 당쟁이 일기 시작하자 한때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힐 생각도 하였으나, 1577년(선조 10) 다시 관계에 나와 집의,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 공조참의, 호조참의를 거치고, 병조참의로 있을 때 당시 병조판서 이이(李珥)를 배척하는 상소가 받아들여지고 지지하는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보고 사직하였다. 1589년 병조참판에 제수되어 대사헌,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同知義禁)을 거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참판 겸 부총관으로서 왕을 호종하였고,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에서 대사간, 공조참판을 지냈다. 1593년 왕을 호종하고 환도하던 중 해주에 이르러 병으로 인하여 뒤에 떨어졌다가, 1595년 왕비를 호종하여 환도한 뒤 형조참판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왕비를 호종하고 수안(遂安) 까지 가서 이듬해 그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묘지는 양주 금촌(金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