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박사창(朴師昌)
  • 반남박씨(潘南朴氏),  출생~사망 : 1687 ~ 174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겸숙(兼叔). 증조부는 박세규(朴世奎), 조부는 병조참판(兵曹參判) 박태소(朴泰素)이고, 아버지는 충좌위행부사직(忠佐衛行副司直) 박필사(朴弼思)이다. 1721년(경종 1) 신축증광사마시(辛丑增廣司馬試)에 진사 2등으로 합격하였고, 1730년(영조 6) 경술정시문과(庚戌庭試文科)에 병과(丙科) 13등으로 급제하였다. 1730년(영조 6) 정언(正言)이 되었으며, 1731년(영조 7) 지평(持平)을 거쳐 공홍도어사(公洪道御使), 호남어사(湖南御使), 1742년(영조 18)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승지(丞旨), 의주부윤(義州府尹) 등을 역임하였다. 1739년(영조 15) 8월 동래부사(東萊府使)로 부임한 박사창은 임진왜란 후에도 여러번 왜인들의 작폐가 심한 것을 알고 먼저 왜인들보다 우수한 군비를 갖춰야 한다고 판단하여, 동래부의 군사시설을 정비하였다. 군기(軍器)로 흑각궁 750장, 화약 1500근, 화살줄 102조 등 많은 무기를 새로 만들고 보완하였으며, 군관청(軍官廳), 수첩청(守堞廳), 무사청(武士廳), 이노작대(吏奴作隊) 등의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또한 왜인들이 작폐를 제어하기 위해 연향대청(宴享大廳), 초량객사(草梁客舍), 동래부객사(東萊府客舍) 등의 시설을 완전히 갖추었다. 그리고 조정에 글을 올려 왜관 내 왜인들이 함부로 관내를 빠져나오지 못하게 용두산 외곽 은산에 복병막을 동서남북에 각각 2개소를 설치하였다. 1735년 편찬한 '서흥군읍지(瑞興郡邑誌)' 서문과 편찬경위를 서술하였다. 특히 서문에는 '휘규지서(彙規之書)'라는 글 3편을 지어 새로운 사실을 수집, 증보하여이 읍지를 만들었음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1740년 목사(牧使) 이서우(李瑞雨)가 찬술한 '장산후지(○山後誌)'와 '동래승람서후지(東萊勝覽書後誌)'를 참고하고 읍인들을 직접 방문하여 얻은 것을 토대로 '동래부지(東萊府誌'를 편찬하였다.이 서문에 산천의 험이(險吏)와 군량, 과갑(戈甲), 기치(旗幟) 등까지 상세히 기재하여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다고 하였다. '동래부지'의 목차는 건치연혁(建置沿革)○ 군명(君名)○ 속현(屬縣)○ 관원(官員)○ 향임(鄕任)○ 면명(面名)○ 도리원근(道里遠近)○ 성씨○ 형승(形勝)○ 산천○ 고적○ 풍속○ 관사○ 누정(樓亭)○ 청사○ 창고○ 관해(官○)○ 초량공해○ 성곽○ 관방○ 봉수(烽燧)○ 학교○ 사묘○ 역원○ 교량○ 불우○ 기우소○ 제언○ 인물○ 효자○ 효녀○ 열녀○ 별전공신○ 과제○ 총묘(○墓)○ 호구(戶口)○ 전결○ 토산○ 곡물○ 각청무부○ 군총○ 군기○ 기치○ 의장○ 부안○ 대동○ 공물○ 잡봉○ 연역○ 인이관속잡차○ 각색장인○ 각사각처노비○ 이문○ 관안○ 선정비○ 생사당○ 제영잡저○ 부산자성비 등으로 되어 있다.이 '동래부지'는 부산지방 향토사 연구에 풍부하면서도 정확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