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강백(剛伯). 호는 농아(聾啞). 윤우신(尹又新)의 증손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교리(校理) 윤섬(尹暹)의 손자이다. 서흥현감(瑞興縣監) 윤형갑(尹衡甲)의 아들이고, 신곡(薪谷) 윤계(尹棨)와 임계(林溪) 윤집(尹集)의 동생이다. 어머니는 창원황씨(昌原黃氏)로 관찰사(觀察使) 황치경(黃致敬)의 딸이다. 1633년(인조 11) 계유증광사마시(癸酉增廣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로 벼슬할 뜻을 그만두고 자연 속에 살면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글을 강론하였다.이 때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산속에서 그를 만났는데 이치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맑고 깨끗한 취향을 가졌다고 술회(述懷)하였다. 1644년(인조 22) 10월 13일에 향년 29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집안이 가난하여 그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김포현(金浦縣) 임촌(林村)에 장사지냈고, 이후 그의 행적을 조정에 아뢰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증직되었다. 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는 별좌(別坐) 윤계득(尹繼得)의 딸로,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윤이건(尹以健)은 1673년(현종 14) 계축식년사마시(癸丑式年司馬試)에 진사 2등으로, 차남 윤이성(尹以性)은 1666년(현종 7) 병오식년사마시(丙午式年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