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가겸(可謙). 호는 북애(北崖). 색(穡)의 7세손으로, 지숙(之叔)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필신(金弼臣)의 딸이다. 1549년(명종 4) 사마시를 거쳐 1560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 보(補)되었다가 뒤에 홍문관정자에 제수되었다. 그뒤 홍문관의 박사, 수찬, 교리를 역임하였다. 이어 지평, 사간원의 정언, 헌납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육조의 관직도 두루 거쳤다. 외임(外任)으로는 함경도북평사, 경기도사를 지냈다. 1568년(선조 1)에 원접종사(遠接從事)가 되어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였다. 1573년 이조정랑 으로부터 검상, 사인, 집의, 전한, 직제학을 거쳐 승지에 이르러 자급(資級)을 뛰어넘어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다. 통정대부로 있을 때 내직으로는 병조, 호조, 형조의 참의와 판결사 및 도승지를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황해, 충청, 전라, 경상 4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1585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으며, 뒤에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었다. 이때 형조, 예조, 이조의 참판, 한성부의 좌윤, 우윤, 부제학, 대사헌, 동지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1589년 간장(諫長)으로서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를 참국(參鞫)하는 공을 세웠다. 이로 인하여 이듬해에는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책록되고 아천군(鵝川君)에 봉하여졌다. 이해 성절사(聖節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1591년에는 형조판서에 제수되었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었다가 뒤에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다. 이때 형조, 예조, 공조의 판서, 좌, 우참찬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헌신하였다. 죽은 뒤에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아천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鵝川府院君)에 추증되었다. 그는 사람됨이 정직하여 아첨을 못하였는데, 이 때문에 홍문관정자로 있을 때에는 권간(權奸)에 의하여 북막(北幕)에 좌천된 적이 있었다. 청렴하여 가산을 돌보지 않아 재상의 반열에 있을 때에도 한사(寒士)처럼 생활하였다. 또한 효도와 우애가 지극하였다. 시호는 의간(懿簡)이다. 저서로는 '북애집' 1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