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의병. 자는 이원(而遠). 호는 취죽당(翠竹堂). 자인(慈仁) 출신. 아버지는 우련(遇鍊)이다. 김우옹(金宇○)의 문인이다. 1587년(선조 20) 밀양 영남루에서 치른 초시에서 수석을 차지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가정을 이끌고 정진(鼎津)에 나아가 곽재우(郭再祐)의 의병군에 가담, 많은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후 사마시에 합격, 생원이 되었다. 일찍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고 또한 박식하였으며, 벼슬에 뜻이 없어 향리에서 연하천석(烟霞泉石) 사이를 소요하면서 독서에 힘썼다. 1633년(인조 11)에 자인 복현(復縣)을 위하여, 방희국(方熙國)을 우두머리로 하여 최두립(崔○立), 이시혐(李時○), 이창후(李昌厚) 등 3백여명과 함께 자인이 경주부에 속하여 현민이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는 상소를 올려 4년 후 실현을 보았다. 1700년(숙종 26) 자인의 상덕사(尙德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