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서화가. 자는 원지(元之). 호는 현석(玄石), 서석(瑞石). 아버지는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우의정 응인(應寅)이며, 어머니는 부사과 이담령(李聃齡)의 딸이다. 1601년(선조 3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정원에 들어가고, 다음해 검열, 대교, 봉교 등을 거쳐, 전적으로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여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뒤 정언, 사서, 수찬 등을 거쳤다. 1613년 아버지가 선조의 유교칠신(遺敎七臣) 중 한 사람으로 계축옥사에 연루되자 사직하고, 뒤이어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보령에 퇴거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병조좌랑이 되고, 수찬에 이르러 신인 등용책을 논의하였다. 이어 종성부사, 부총관(副摠管), 한성부우윤, 지중추부사, 형조판서, 개성유수 등을 거쳐, 1643년 지돈령부사가 되어 치사(致仕)하였다. 홍문관에 있을 때에는 자주 경연(經筵)을 열었고, 세자책봉주청사(世子○封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병자호란을 당하여서는 개성유수로서 강화도에 피난하였다가 이듬해 환도하였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여 뒤에 언관으로부터 직무유기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한편, 이괄(李适)의 난 때는 삼도독향어사(三道督餉御使)가 되어 군량을 조달하였고, 만년에는 지돈령부사로서 진향부사(進香副使)가 되어 인평대군(麟坪大君)을 따라 심양(瀋陽)에 자주 다녀왔다. 서예에 뛰어나 팔법(八法)에 능하였으며, 이 때문에 당시 태학(太學)의 장소(章疏), 비문(碑文), 나라의 묘주(廟主) 등에 거의 그의 붓을 빌렸다 한다. 작품으로는 글씨로 우상한응인묘비(右相韓應寅墓碑)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