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서예가. 자는 경여(敬輿). 호는 물암(勿菴). 도승지 사홍(士洪)의 아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8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49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고 홍문관에 들어간 뒤 사가독서(賜暇讀書)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때 사림이 탄핵을 받게 되자 김종직의 제자로서 강백진(康伯珍), 이계맹(李繼孟), 강혼(姜渾) 등과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비방하고 세상의 일을 비평하였다 하여 곤장 100대를 맞고 천리 밖으로 귀양갔었다. 일찍이 시 한 절구를 병풍에 썼는데 ' 요순(堯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한 것인데, 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을 괴롭혔는가○ 재앙이 집안에서 일어날 줄을 모르고, 공연히 오랑캐를 막으려고 만리장성을 쌓았구나. '라고 하였다. 어느날 연산군이 사홍의 집에 들렀다가 그가이 시를 쓴 것을 알게 되어 화를 당하여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으나, 1504년 갑자사화 때 죽임을 당하였다.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으며, 경기도 여주의 '임호문공원준신도비 任胡文公元濬神道碑'와 양주의 '성판서건묘비 成判書健墓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