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문인.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음(湖陰). 부사 광보(光輔)의 아들이며, 영의정 광필(光弼)의 조카이다. 1509년(중종 4)에 생원이 되고, 이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장원하였다.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 하였고, 1516년 황해도도사로서 문과중시에 장원하였으며 사간을 거쳐 1523년 부제학이 되었다. 1534년 동지사(冬至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42년 예조판서로 승진이 되고, 1544년 공조판서로 다시 동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54년 대제학이 되었으나 1558년 과거의 시험문제를 응시자 신사헌(愼思獻)에게 누설하여 파직되었다. 이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복직되고 이어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1562년 다시 판중추부사에 전임되었다. 이듬해 사화를 일으켜 사림을 제거하려던 이량(李樑)의 일당이라 하여 삭직당했다. 그는 일찍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문명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여러번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동안 중국인과 주고받은 시가 많았다. 중국에 다녀와서 '조천록 朝天錄'을 남겼으며, 말을 치밀하게 다듬어 웅걸차고 기이한 문구를 얻으려는 시풍을 장기로 삼았다. 특히, 칠언율시에 능하였으며, 당시 문단에서 그와 신광한(申光漢)을 쌍벽으로 꼽기도 하였다. 관료적인 시인으로 시문, 음률에 뛰어났고 글씨에도 능했으나 탐학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저서로는 '호음잡고', '조천록' 등이 있고, 글씨로는 광주(廣州)에 있는 이둔촌집비(李遁村集碑)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