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맹진(李孟畛)
  • 한산이씨(韓山李氏),  출생~사망 : 1374 ~ 1456
조선 전기의 문신. 호는 청허재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손자이며, 문양공(文襄公) 이종덕(李鐘德)과 정경부인(貞敬婦人) 진주유씨(晉州柳氏)의 아들이다. 지군사(知郡事) 무송윤씨(茂松尹氏) 윤충보(尹忠補)의 딸과 혼인하여 이연기(李衍基), 이유기(李裕基), 이보기(李保基), 이순기(李順基) 네 아들을 두었다. 음직으로 벼슬길에 올라 1410년(태종 10) 좌랑(佐郞) 을, 1414년에는 지평(持平)을 지냈다. 1430년(세종 12) 호조참판(戶曹參判), 이듬해에는 경창부윤(慶昌府尹), 1432년에는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내고, 이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역임하였으며, 1433년에는 진헌사(進獻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1439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호조참판, 1443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냈다. 1444년 제주도 부근의 섬이 몇인지 조사하여, 보고하고 소산물을 바쳤다. 이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지낸 뒤 1445년에 함길도관찰사(咸吉道觀察使)가 되었고, 1448년 다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가 되었다. 1453년(단종 1)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1455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노쇠해졌음을 이유로 직책을 사양하였다. 1456년(세조 2) 사육신의 난에서 육촌형인 백옥헌(白玉軒) 이개(李塏)와 뜻을 같이 했던 차남 도총진무(都摠鎭撫) 이유기가 능지처참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일가족이 노비로 전락하게 되었다. 세조의 특명으로 이맹진는 부자연좌죄(父子緣坐罪)에서 풀려나 목숨은 부지하게 되었으나 아들과 손자의 죽음과 며느리와 딸들이 노비로 전락하게 된 충격으로이 해에 세상을 떠났다. 훗날 태보(太保)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