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문신. 호는 남촌(南村). 현감(縣監) 윤응(尹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추(判樞) 판봉상사(判奉常事) 윤기묘(尹起畝)이다. 참판(參判) 윤구(尹○)의 아들이자, 첨정(僉正) 윤지청(尹之淸)의 동생이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식년사마시(甲子式年司馬試)에 진사로 합격하여 1506년(연산군 12) 벼슬이 호조정랑(戶曹正郞)에 이르렀다. 당시 문장으로 유명한 감사(監司) 김만종(金萬鍾), 눌재(訥齋) 박상(朴祥), 하천(霞川) 고운(高雲)과 더불어 시를 지어 교류하였다. 스스로 찬한 지(誌)에 따르면, '아홉 마디의 창양(昌陽)은 수명의 긴 것과 같고 높은 뫼는 그 성품의 굳셈과 같다. 겸공(謙恭)을 밖으로 들어내고 성경(誠敬)을 안으로 간직하였다. 오유(五遊)하고 추창(趨昌)하며 구원(邱園)에서 숨어 살아 문장을 스스로 머금고 광채를 스스로 감추었다. 문을 닫고 생도를 가르치며 혹은 방으로 들어가고 혹은 마루로 오른다'라 하였다. 저서로 현재 '남촌유고(南村遺稿)'가 국립중앙도서관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