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문신. 초명은 우성(禹成). 자는 수옹(守翁). 호는 영해(領海). 제년(齊年)의 아들이다. 1450년(문종 즉위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고, 무재(武才)가 있어 특별히 사복시주부를 겸임하였다. 이듬해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 통례문봉례랑(通禮門奉禮郞)에 임명되었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문종의 명을 받아 '진서 陣書'를 찬술할 때 좌랑으로서 참여하였으며,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에게 임금이 어리고 나라가 위태하니 정국(政局)을 바로잡을 큰 일을 일으켜야 된다고 진언(進言)하고는 권람(權擥)을 모사(謀士)로 천거하였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세력인 황보 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 원로대신을 살해, 제거하는 계유정난을 일으킬 때 적극 가담, 협력하여 정난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이어 사복시판관에 승진되고 장령을 거쳐 1455년 판사복시사가 되었다. 이해 세조가 즉위하자 예조참의에 임명되고, 세조의 즉위를 보좌한 공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록되었으며, 참판에 승진, 인산군(仁山君)에 봉하여졌다. 1457년(세조 3) 예조판서, 경상우도도절제사, 1459년 다시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모련위(毛憐衛)의 야인(野人: 女眞)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장(大將) 신숙주(申叔舟)의 부장(副將)이 되어 이를 토벌하고, 1467년 우의정, 1469년(예종 1) 좌의정이 되었으며, 이해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영의정에 승진, 이듬해 인산부원군(仁山府院君)에 진봉되었다. 1471년(성종 2) 성종의 즉위를 보좌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성질이 사나워 권세를 얻은 뒤에는 행의(行誼)를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기세(氣勢)로써 다른 사람을 능멸하고, 가노(家奴)를 놓아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있었으나 세조는 그가 정난(靖難)의 원훈(元勳)인 이유로써 단지 책망만 할 뿐 처벌은 하지 않았다. 시호는 위평(威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