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맹상(李孟常)
  • 양성이씨(陽城李氏),  출생~사망 : 1376 ~ ?
조선 전기의 문신. 조부는 이춘부(李春富)이고, 부친은 이한(李澣)이다. 부인은 유자(柳滋)의 딸이다. 1411년(태종 11)에 강릉판관(江陵判官)에 제수 되었고, 재임 중에 강릉향교(江陵鄕校)를 중건하였다. 1424년(세종 6)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이 되었다가 곧 물러났다. 1432년에는 관반(館伴)으로 있었고, 1437년 지사간(知司諫)를 역임하였다. 1438년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맡고 있을 때, 사헌부에서 치조를 요구했으나 곧 다시 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형조참의(刑曹參議) 를, 1440년에는 원주목사(原州牧師)를 거쳐 전라도(全羅道),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냈다. 1441년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당시 임금으로부터 안마(鞍馬) 등을 하사 받았고, 공조참의(工曹參議), 호조참의(戶曹參議)를 거쳐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에 역임했다. '동문선(東文選'에 '차사간원운정요장(次司諫院韻呈僚丈)'란 칠언절구 한 수가 남아있는데, 그의 관직생활과 시재(詩才)를 엿볼 수 있다. 즉 '자고새가 늘어선 곳에 어로(御爐)의 연기는 꼿꼿이 오르고, 맑은 날에 헌(軒)에 다다르시매 성안(聖顔)을 뵈옵겠네, 신하들이 석연에 젖었다고 아뢴 뒤에, 금천교 다리 위해 취해 돌아오노라(御爐煙矗○○班, 白日臨軒賭聖顔. 奏罷群臣霑錫宴, 禁川橋上醉同還). '아들 4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이겸지(李謙之)는 1423년(세종 5) 계묘식년문과(癸卯式年文科)에 동진사(同進士) 17등으로 급제하여 장령(掌令)이 되었고, 이순지(李純之)는 1427년(세종 9) 정미친시문과(丁未親試文科)에 을과(乙科) 2등으로 급제하여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는데, 조선 초기의 최고의 천문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또 이효지(李孝之)는 1429년(세종 11) 기유식년문과(己酉式年文科)에 동진사(同進士) 2등으로 급제하여 교서관교리(校書館校理)가 되었고, 이전지(李全之)는 1432년(세종 14) 임자식년문과(壬子式年文科)에 병과(丙科) 7등으로 급제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