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문신. 이선(李渲)이라고도 한다. 조부는 이개(李開)인데, 이덕시(李德時)로 개명하였다. 아버지는 이등(李䔲)이며, 어머니는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딸 의령옹주(宜寧翁主)이다.
1432년(세종 14) 이선(李宣)이 과거를 보려 함에 간원(諫院)들은 그가 선왕의 서얼이며 이미 벼슬이 3품에 이르렀다하여 응시를 정지시킬 것을 상소하였으나 세종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임자식년문과(壬子式年文科)에 병과 6등으로 급제한 후 특별히 세종이 쌀 10석을 하사하고, 집현전부제학(集賢殿副提學)으로 삼았다.
1437년(세종 19)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재직 중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1441년 다시 예조참판에 임명되었고 1448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거쳐 이듬해 지중추원사(知中樞府事),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
1450년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하자 지중추원사로 명나라에 가서 왕의 서거를 알리고 시호를 청하였다.이 해에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으나 장오죄(贓汚罪)를 범하여 의정부(議政府)와 장령(掌令) 하위지(河緯地)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어 1451년(문종 1)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었으나 장령 신숙주(申叔舟)가 예문관대제학은 본관(本館)이 유림의 장(長)이고, 또 문과시험을 관장하기 때문에 이선은 적임자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 뒤 중추원사(中樞院使)를 거쳐 1455년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고, 세조가 즉위한 후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59년(세조 5) 함길도에서 돌아오다가 큰 비를 만났는데, 고산역(高山驛) 앞 냇가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 세조가 문량(文良)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1432년(세종 14) 이선(李宣)이 과거를 보려 함에 간원(諫院)들은 그가 선왕의 서얼이며 이미 벼슬이 3품에 이르렀다하여 응시를 정지시킬 것을 상소하였으나 세종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임자식년문과(壬子式年文科)에 병과 6등으로 급제한 후 특별히 세종이 쌀 10석을 하사하고, 집현전부제학(集賢殿副提學)으로 삼았다.
1437년(세종 19)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재직 중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1441년 다시 예조참판에 임명되었고 1448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거쳐 이듬해 지중추원사(知中樞府事),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
1450년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하자 지중추원사로 명나라에 가서 왕의 서거를 알리고 시호를 청하였다.이 해에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으나 장오죄(贓汚罪)를 범하여 의정부(議政府)와 장령(掌令) 하위지(河緯地)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어 1451년(문종 1)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었으나 장령 신숙주(申叔舟)가 예문관대제학은 본관(本館)이 유림의 장(長)이고, 또 문과시험을 관장하기 때문에 이선은 적임자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 뒤 중추원사(中樞院使)를 거쳐 1455년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고, 세조가 즉위한 후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59년(세조 5) 함길도에서 돌아오다가 큰 비를 만났는데, 고산역(高山驛) 앞 냇가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 세조가 문량(文良)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