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문신. 장령(掌令) 한의 손자이며, 오(吾)의 아들이다. 1465년(세조 11)에 춘방문과(春坊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곧 봉교(奉敎)를 거쳐, 1472년(성종 3)에는 그의 효심이 널리 알려져 정표를 내리라는 하교가 있었다. 1474년 정언(正言)이 되고, 왜인의 침입을 막지 못한 관압사(管押使) 장유성(張有誠) 대신 다른 인물로 대치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1479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는데, 그는 명확한 논변으로 죄인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여 왕으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그뒤 1489년에는 광흥창수(廣興倉守)가 되었는데, 신료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아 이천부사(利川府使)로 추천되었다. 1494년 이천부사로 임기만료가 되었는데, 그곳의 부민들이 그를 연임해줄 것을 상언(上言)할 정도로 선치를 베풀었다. 그해 부민들의 상언에 따라 다른 지방의 수령들까지 포상의 범위가 논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