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희점(希點).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의 후손으로,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 윤돈(尹惇)의 손자이자, 성정공(成靖公) 이승손(李承孫)의 외손자이다. 아버지는 삼척부사(三陟府使) 윤계홍(尹繼興)으로 손자인 영의정(領議政) 윤인경(尹仁鏡)이 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弘濟保翼功臣) 1등이 되고, 파성부원군(坡城府院君)으로 봉해지면서 찬성(贊成)에 추증되었고, 윤돈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윤인경이 그의 조카가 된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청주경씨(淸州慶氏)로 병조참판(兵曹參判) 경여(慶餘)의 딸이다. 1456년(세조 2) 병자식년사마시(丙子式年司馬試)에 진사로 합격하였고 1466년(세조 12) 병술고성별시문과(丙戌高城別試文科)에 3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제수되었다. 그 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를 거쳐 사간원정원(司諫院正言), 예조좌랑(禮曹佐郞), 형조좌랑(刑曹佐郞), 진주판관(晉州判官), 공조정랑(工曹正郞), 안악군수(安岳郡守),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 승문원참교(承文院參校), 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을 역임했다. 다시 사간원으로 들어가 사도시정(司導寺正), 해주목사(海州牧使), 통례원 우통례(通禮院右通禮)를 제수 받았다. 성품이 온화하고 거문고, 바둑, 책, 그림을 즐겼다. 글 솜씨가 뛰어나서 오랫동안 승문원(承文院)에 재직하였고 사가(史家)로서 갖추어야 할 재지(才智), 학문, 식견(識見)을 지니고 있어 사직(史職)을 겸하였다. 1503년(연산군 9) 10월 69세로 세상을 떠나 양주군(楊州郡) 송산리(松山里)에 묻혔는데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로 그의 시신이 파헤쳐져 목을 베이는 참상(慘狀)을 겪었다. 중종 즉위 후,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고 차남 동래현령(東萊縣令) 윤인복(尹仁復)이 왜놈을 지킨 종훈(從勳)으로 참판(參判)에 가증(加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