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태초(太初). 호는 여병재(如甁齋). 조부는 이조판서 김관(金觀)이고, 아버지는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 초명 孝起)이다. 김현석(金玄錫)은 거창(居昌)과 양지현감(陽知縣監)을 거쳐 영월군수(寧越郡守)를 역임하였다. 그는 아버지인 김문기가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이조판서로 내외종간(內外從間)인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등과 더불어 1456년(세조 2) 단종(端宗)을 복위시키려다 탄로되어 그 해 6월 8일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처형되자 아버지를 따라 순절하였다. 아들 김충주(金忠柱)와 손자 김현남(金玄南), 고손 김약전(金約前) 등이 모두 충효로 가문을 빛내어 1763년(영조 39) '5세충효(五世忠孝)'의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1791년(정조 15) 장릉배식단(莊陵配食壇)에 배향되었다. 이후 1977년 7월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에서 사육신(死六臣) 문제를 규명하기 위한 특별위원회에서 '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顯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의가 만장일치로 채택되어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묘역에 그의 가묘(假墓)가 설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