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중보(仲父). 호는 통계(通溪). 아버지는 공목공(恭穆公) 강시(姜蓍)이고, 강회백(姜淮伯)의 아우이다. 전처는 의령남씨(宜寧南氏)로 판사(判事) 남징(南徵)의 딸이고, 후처는 전주최씨(全州崔氏)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성주지사(星州知事) 최영(崔寧)의 딸이다. 1373년(공민왕 22) 군자시승(軍資寺丞)으로 처음 벼슬길에 올라 최영(崔瑩) 장군을 따라 탐라도를 토평(討平)하였고, 1379년(우왕 5) 전농시승(典農寺丞)이 되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에게 사사하였고, 순흥군 안종원(安宗源)과 판후덕부사 윤진(尹珍)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382년(우왕 8) 진사문과에 합격하였다. 1685년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역임하고,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면서 두문동(杜門洞)에서 은거하였다. 1390년(공양왕 2) 사헌부집의(司憲府執議), 1392년 군자윤(軍資尹)이 되었고, 4월 이성계를 제거하려다 실패한 옥사에 연루되어 형과 함께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이색과 함께 결당 모란(結黨謀亂)하였다는 죄로 본향에 안치되었다. 1398년(태조 7) 4월 궁성을 쌓던 인부들을 왕명보다 먼저 놓아 보낸 죄로 외방에 귀양 보내졌다가, 10월에 좌우사간대부(左右司諫大夫)가 되었다. 1415년(태종 15) 신정을 하례하기 위해 중국에 다녀왔고, 1417년(태종 17) 함길도도순문사(咸吉道都巡問使)가 되었다가 무고죄로 갇혔으며, 1418년(태종 18)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겸 개성부유후(開城府留後), 인수부윤(仁壽府尹)을 역임하였다. 이듬해에 한성부윤(漢城府尹), 공조참판(工曹參判),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1421년(세종 3) 4월 4일 총제(摠制)로 재직 중에 졸(卒)하여 미두(米豆) 20석이 내려졌다. 저서로 '전해고문진보지(箋解古文眞寶誌)'가 있고, 묘는 고양군 벽제면 관산리 시묘골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