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중보(仲保), 중심(仲深). 증조부는 박형(朴亨)이고, 조부는 박이(朴○)이고, 아버지는 목사(牧使) 박임경(朴臨卿)이다. 외조는 성삼문(成三問)이고, 처부는 이윤정(李允靖)이다. 1501년(연산군 7) 신유증광사마시(辛酉增廣司馬試) 진사(進士) 3등에 합격하고, 1502년(연산군 8) 임술별시문과(壬戌別試文科)에 2등으로 급제하여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1513년(중종 8) 질정관(質正官)으로 임명되어 부연사행(赴燕使行)의 서장관(書壯官) 들이 불법으로 무역을 하는 비리를 단속하였다. 경학(經學)과 사장(辭章)에 밝아 사유(師儒)로 선발되었지만 소신이 없어 사의(司議), 집의(執議), 승지(承旨) 등으로 임명될 때 신진사류에 의해 거부되는 경우가 많았다.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1519년에 대사간(大司諫)에 보임되었고, 이어서 형조참판(形曹參判), 도승지(都承旨),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역임하였다. 1525년에 정조사(正朝使)로 명에 다녀 온 후 대사간, 예조참판(禮曹參判),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528년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다. 이때 공무가 고되어 병을 이유로 체직을 요구하다가 발각되어 추국을 받기도 하였다. 이듬해 공조참판(工曹參判), 대사헌을 다시 역임하고 1530년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그 후 우참찬(右參贊), 호조판서(戶曹判書)를 거쳐 1532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내고 이듬해 우참찬을 역임하는 동안에 병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