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언이(彦而). 조(稠)의 아들이다. 일찍이 진사가 되고 1540년(중종 3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46년(명종 1)에 부수찬(副修撰)이 된 뒤 병조좌랑(兵曹佐郞), 호조정랑(戶曹正郞), 사헌부헌납(司憲府獻納), 홍문관교리, 병조정랑, 이조정랑 등 여러 관직을 거치는 동안 청렴결백하다 하여 1551년 염근리(廉謹吏)로 뽑혔다. 이어서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사복시정(司僕寺正),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 병조참지(兵曹參知) 등을 거쳐, 1555년 충청도관찰사가 된 뒤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 우승지(右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1557년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이어 황해도관찰사로 다녀와 이듬해 대사간(大司諫)이 되어 명나라의 사신에 대한 접대 등 조폐로 황해도 일대에 피역자(避役者)가 많고 관속(官屬)들마저 유리되고 있는 실정임을 들어 그 대책의 시급함을 간하였다. 1559년 대사헌이 되고 이어서 홍문관부제학, 대사성, 이조참판, 예조참판을 거쳐, 1563년에 다시 대사간이 되어 매관육작(賣官○爵)에 눈이 어두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원계검(元繼儉)의 파직을 상소하였다. 이듬해 형조판서에 오른 뒤 예조판서, 금부당상, 지중추부사, 공조판서를 거쳐, 1567년 이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진하 겸 태자책봉사(進賀兼太子○封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71년(선조 4) 병조판서가 되고 이어서 지경연(知經筵), 예조판서, 공조판서, 형조판서, 이조판서를 번갈아 가면서 역임하다, 1575년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