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안이(安而). 서운관정(書雲觀正) 김완(金緩)의 손자이며 집의(執義) 김질(金晊)의 아들이다.
1429년(세종 11)에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어 소문전직장(昭文殿直長)에 특배(特拜)되고 이어 해주판관(海州判官)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뒤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지평(持平), 병조정랑(兵曹正郞)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한 다음 영흥(永興), 정평(定平) 양도호부사(兩都護府使)로 나갔다가 돌아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외직인 성주(星州), 나주(羅州),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지내면서 혜정(惠政)을 베풀었다. 그 뒤 이조참의(吏曹參議),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예조참의(禮曹參議)를 지내고 이어 강원도(江原道),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1451년(문종 1)에 서울 사직단(社稷壇) 북쪽 도성(都城)이 무너진 것을 보고 이명민(李明敏)과 함께 도성수축(都城修築) 감독관이 되어 경기(京畿), 충청(忠淸), 전라도(全羅道)의 선군(船軍)을 1회에 1, 000∼2, 000명씩 동원하여 도성 수축에 공을 세웠다. 1481년(성종 12)에는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경상북도 안동(安東)의 태사묘(太師廟)의 묘우(廟宇) 터전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1429년(세종 11)에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어 소문전직장(昭文殿直長)에 특배(特拜)되고 이어 해주판관(海州判官)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뒤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지평(持平), 병조정랑(兵曹正郞)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한 다음 영흥(永興), 정평(定平) 양도호부사(兩都護府使)로 나갔다가 돌아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외직인 성주(星州), 나주(羅州),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지내면서 혜정(惠政)을 베풀었다. 그 뒤 이조참의(吏曹參議),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예조참의(禮曹參議)를 지내고 이어 강원도(江原道),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1451년(문종 1)에 서울 사직단(社稷壇) 북쪽 도성(都城)이 무너진 것을 보고 이명민(李明敏)과 함께 도성수축(都城修築) 감독관이 되어 경기(京畿), 충청(忠淸), 전라도(全羅道)의 선군(船軍)을 1회에 1, 000∼2, 000명씩 동원하여 도성 수축에 공을 세웠다. 1481년(성종 12)에는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경상북도 안동(安東)의 태사묘(太師廟)의 묘우(廟宇) 터전을 마련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