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전지(李全之)
  • 양성이씨(陽城李氏)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사부(士○). 증조부는 이춘부(李春富)이고, 조부는 이한(李澣)이며, 부친은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이맹상(李孟常)이다. 외조부는 문화유씨(文化柳氏) 유자(柳滋)이다. 1417년 정묘식년사마시(丁卯式年司馬試)에 생원 3등으로 합격하고, 1432년(세종 14) 임자식년문과(壬子式年文科)에 병과(兵科) 7등으로 급제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다. 1440년(세종 22)에 부친 이맹상이 외직인 원주목사(原州牧使)로 임명되자 노환(老患)을 들어 부당함을 아뢰었다. 1444년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가 되었고, 1451년(문종 1)에 예조정랑(禮曹正郞)을 거쳐, 1455년(세조 1) 수판관(守判官)을 역임했다. 1456년 아들 이예(李芮)가 가자(加資)하게 되자 이전지가 대신 받았다. 그 해 이순지(李純之) 등 친지들과 함께 활쏘기를 한 것으로 의금부에서 물의가 있었으나 왕이 처벌을 윤허치 않았다. 1463년에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으로, 1464년에는 첨지충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있었다. 1467년에 전 첨지중추원사로 사헌부에 장고한 기록이 전한다. 사후에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추증되었다. 묘는 남양주(南楊州) 화도읍(和道邑) 차산리 가곡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