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맹견(孟堅). 증조부는 김후(金珝)이고, 조부는 김탄지(金坦之)이며, 부친은 현감(縣監) 김지(金○)이다. 모친은 전공총랑(典工摠郞) 고첨(高瞻)의 딸이고, 처는 신주감무 경주최씨 최청(崔淸)의 딸이다. 1411년(태종 14) 갑오식년문과(甲午式年文科)에 을과(乙科) 3등으로 급제하였다. 1421년(세종 3)에 전농시주부(典農寺主簿)와 춘추관 관직을 겸대(兼帶)하였다. 1422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는데, 당시 큰비가 내려 성안의 내와 개천이 흘러 넘쳐 물가의 인가가 표류한 것이 많으므로, 임금의 명을 받아 표류 침몰한 상태를 살펴보는 임무를 맡았다. 1425년 다시 검찰에 제수되었고 예조좌랑(禮曹佐郞), 함경도도사(咸鏡道都事)를 거쳐 1426년에 이조좌랑(吏曹左郞)이 되었고, 그 후 교서관교리(校書館校理), 사헌부우헌납(司憲府右獻納), 지제교(知製敎), 하정서장관(賀正書狀官),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호조(戶曹),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지냈다. 부모의 노환을 이유로 외직을 청하여 정선군수(旌善郡守)로 나갔다. 1430년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영녕대군(永寧大君)을 서울로 불러들이는 것의 부당함을 상소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해 성개(成○)의 노비사건을 오래도록 보고하지 않았던 관계로 의금부에 수감되었다. 1436년 다시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복직되어 사재감부정(司宰監副正), 직보문각(直寶文閣), 평안도경력(平安道經歷), 한성부(漢城府)와 봉상시소윤(奉常寺少尹),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직예문관(直藝文館)을 역임하고, 1445년에 선산부사(善山府使)로 나가 학교를 수리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460년(세조 6)에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양주(楊州) 풍양(豊壤)에 퇴거하였다. 1462년 8월 어가가 양주 유포(柳浦)에 이르자 임금에게 홍시를 올리고 옷 1령, 어육 등의 물건을 하사 받았다. 성품이 엄정하고 청렴 신중하여 명망이 높았다. 신도비와 묘는 남양주(南楊州) 진건면(眞乾面) 배양 1리에 있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김백형(金伯衡)은 1447년(세종 29) 정묘식년사마시(丁卯式年司馬試)에 생원 3등으로 합격하고, 1469년(예종 1) 기축추장문과(己丑秋場文科)에 을과 3등으로 급제, 김중형(金仲衡)은 1457년(세조 3) 정축별시문과(丁丑別試文科)에 정과 1등으로 급제, 김계형(金季衡)은 1466년(세조 12) 병술고성춘시문과(丙戌高城春試文科)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