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명종, 선조 때의 문신. 자는 운보(雲甫). 호는 낙곡(駱谷). 김해(金瀣)의 아들이다.
1546년(명종 1) 증광시에 갑과로 급제, 봉상시주부, 경성판관(鏡城判官)을 거쳐 1557년 암행어사로 평안도에 파견되었다. 이어서 장령으로 인산진첨절제사(麟山鎭僉節制使)가 되었으나, 부적격자로 교체되어 돌아와 부교리에 올랐다. 그뒤 시강원필선, 홍문관전한을 거쳐 의주목사, 황해도관찰사 등의 외직을 지냈다. 부호군, 장례원판결사, 동부승지, 전라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 도승지 등을 거쳐, 1564년 평안도병마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그때 그의 예하 군인 3백여인이 월경하여 야인을 토벌하다 크게 패배하였는데 이로 인해 추고(推考), 파직당하였다. 그뒤 곧 복직되어 평안도관찰사, 개성유수 등을 거쳐 1571년(선조 4) 대사헌이 되었다. 평소 효우(孝友)하고 문무를 겸비하였으며, 외직에 있을 때는 엄명으로 다스려 간활(姦猾)이 중지되었다고 한다.
1546년(명종 1) 증광시에 갑과로 급제, 봉상시주부, 경성판관(鏡城判官)을 거쳐 1557년 암행어사로 평안도에 파견되었다. 이어서 장령으로 인산진첨절제사(麟山鎭僉節制使)가 되었으나, 부적격자로 교체되어 돌아와 부교리에 올랐다. 그뒤 시강원필선, 홍문관전한을 거쳐 의주목사, 황해도관찰사 등의 외직을 지냈다. 부호군, 장례원판결사, 동부승지, 전라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 도승지 등을 거쳐, 1564년 평안도병마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그때 그의 예하 군인 3백여인이 월경하여 야인을 토벌하다 크게 패배하였는데 이로 인해 추고(推考), 파직당하였다. 그뒤 곧 복직되어 평안도관찰사, 개성유수 등을 거쳐 1571년(선조 4) 대사헌이 되었다. 평소 효우(孝友)하고 문무를 겸비하였으며, 외직에 있을 때는 엄명으로 다스려 간활(姦猾)이 중지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