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박제순(朴齊純)
  • 반남박씨(潘南朴氏),  출생~사망 : 1858 ~ 1916
조선 말기의 문신. 을사오적의 한사람. 호는 평재(平齋). 경기도 용인 출신. 참정 홍수(洪壽)의 아들이다.

1883년(고종 20)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주사(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主事)겸 기연해방군사마(畿沿海防軍司馬), 주차천진종사관(駐箚天津從事官), 홍문관부교리, 사헌부장령, 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1886년 주차천진독리통상사무(駐箚天津督理通商事務)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한 뒤 이조참의, 성균관대사성, 호조참의, 형조참판, 예조참판, 인천부사, 한성부윤 등을 지냈다. 1893년 호조참판 재직시에 동학도들이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내세워 보은집회를 개최하자 청나라 군사의 파병문제를 위안스카이(袁世凱)와 협의하였다. 1894년 이조참판에서 장흥부사로 전임된 뒤 전라도관찰사, 충청도관찰사를 지냈다. 충청도관찰사 재직시에는 일본군 및 경군(京軍)과 연합하여 공주 에서의 동학농민군토벌작전에 참여하였다. 1895년 이후 외부협판, 중추원의관, 외부대신, 육군참장, 의정부찬정 등을 지냈다. 외부대신 재직시에는 간도행정관리권 교섭 그리고 경흥 및 의주의 개방 등 외교문제를 다루는 한편, 1899년 조청통상조약(朝淸通商條約), 1901년 조비수호통상조약(朝比修好通商條約), 1902년 조백수호통상조약(朝白修好通商條約) 등을 체결하였다. 1902년 주청전권공사(駐淸全權公使)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가 1904년 귀국하여 1905년에는 외부대신으로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와 을사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을사오적'의 한 사람으로 규탄받았다. 그뒤 의정대신이 되어 1907년 이른바 '이완용내각(李完用內閣)'이 성립될 때까지 내각을 이끌어갔다. 이완용 내각하에서도 내부대신을 역임하였으며, 1909년 이완용이 저격당한 뒤에는 일시 임시내각총리대신서리를 지냈다. 1910년 8월에는 내부대신으로서 이른바 '한일합방조약'에 서명하였으며 그뒤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중추원고문을 지냈다. 관직 외에 1908년경에는 윤덕영(尹德榮), 민영기(閔泳綺) 등과 함께 교육진흥과 위생의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관진방회(觀進坊會)를 조직하여 그 회장직을 역임하였고, 유림의 태두로 대우받기도 하였으며, 서예에도 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