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의 문신. 초명은 창호(昌鎬). 자는 경로(景魯). 정언 승규(承圭)의 아들이다. 1864년(고종 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 주서(注書), 사성 등을 지냈다. 1869년 상호도감(上號都監)의 도제조 이하를 시상할 때 집례(執禮)로 가자(加資)되었고, 수릉(綬陵), 경릉(敬陵), 광릉(光陵), 휘경원(徽慶園)의 친제시(親祭時)에도 역시 집례로 가자되었으며, 전한으로 옥당(玉堂)의 연차(聯箚)에도 참여하였다. 1878년에는 영광군수 재직시의 치적의 포상으로 승서(陞敍)되었다. 1881년 좌부승지가 되었다가 죄를 얻어 문경현으로 잠시 유배되었으며, 곧 방송되어 이듬해 가례도감(嘉禮都監)의 전교관(傳敎官)으로 가자되고, 이어 진하사은 겸 세폐사(進賀謝恩兼歲幣使)의 부사로 선임되었으나 병으로 인하여 민종묵(閔種默)이 대신 청나라에 다녀왔다. 1885년 감시(監試)의 시관을 역임하고 1887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1889년 호군, 사헌부대사헌 등을 지내고, 이듬해 상책보급진하시(上○寶及陳賀時)에서 대거승지(對擧承旨)로 가자되었다. 1899년 궁내부특진관이 되었으며, 1902년 비서원승(○書院丞)을 거쳐 장례원경(掌禮院卿)에 임명되었다. 1904년 박정양(朴定陽) 등과 함께 산릉도감(山陵都監)의 당상을 맡아보다가 이어 예조판서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