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의 문신. 초명은 석구(晳九). 자는 미경(米卿). 호는 월파거사(月坡居士). 판서 봉하(鳳夏)의 손자로, 동석(東奭)의 아들이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둘째사위이다. 1880년(고종 17)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승지, 부제학, 대사성, 이조참의, 규장각직제학, 예조참판 등을 거쳤다. 1896년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된 뒤 궁내부협판, 서리대신사무(署理大臣事務) 등 주로 궁내부의 요직을 지내며 왕실의 의례를 담당하였다. 그밖에 평식원총재(平式院總裁), 의정부찬정, 판돈령부사, 기로소비서장(耆老所○書長) 등도 역임하였다. 한일합방 때 전 의정부찬정이라는 명의로 일본정부가 주는 은사금(恩賜金) 및 남작의 칭호를 거절하고 합방조서(合邦詔書)와 고유문(告諭文)을 찢었다. 합방에 항의하여 두 차례나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가족들이 구원하여 실패에 그쳤다. 그뒤 양주 사릉리(思陵里)에서 미망인이라 자처하고 은둔하였다. 1917년 스스로 월파거사 라 칭하며 금강산 반야암(般若菴)에 은거중 1919년 고종이 죽자 상경, 인산(因山)을 치르고 중국 허난성(河南省)으로 망명하였다. 7년 동안의 유랑 도중 둘째아들 남익(南益)의 사망소식을 듣고 귀국, 봉선사(奉先寺)에 기거하다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