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돈우(李敦宇)
  • 전주이씨(全州李氏),  출생~사망 : 1801 ~ 1884
조선 말기의 문신. 초명은 돈영(敦榮). 자는 범약(凡若) 또는 윤공(允恭). 호는 신게(莘憩). 득일(得一)의 손자로, 첨지중추부사 상두(相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사선(金思善)의 딸이다. 상형(相衡)에게 입양되었다. 1827년(순조 27) 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홍문록에 올랐으며, 곧 홍문관제학이 되었다. 1831년 도청(都廳)을 역임한 뒤, 1836년 이조참의가 되고 이듬해 집의가 되었다. 그뒤 1840년(헌종 6) 이조참판에 오르고 이듬해 전라도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쌓았다. 1843년 중앙으로 돌아와 이조참판에 다시 등용되고 1845년 대사헌이 되었다. 그뒤 형조판서, 대사헌, 한성부판윤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으며, 1849년(철종 즉위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853년 공조판서, 판의금부사를 거쳐 1855년 예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냈다. 이듬해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를 거쳐 1857년 다시 판의금부사를 지냈다. 1858년 이조판서가 되고, 1860년 형조판서, 공조판서를 역임한 뒤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다시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861년 경상도관찰사로 나아가 각지에서 발생하는 민란수습에 전력하다가 중앙으로 돌아와 이듬해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863년(고종 즉위년) 국장도감(國葬都監)의 제조로 국장도감의 애책문제술관(哀○文製述官) 으로서의 구실을 다하였다. 1864년 좌참찬, 판의금부사, 호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실록찬수당상으로 '철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호조판서, 부묘도감제조를 거쳐 1866년 다시 제조, 호조판서를 지냈다. 그뒤 1874년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으로 세자를 보필하였고, 이듬해 좌찬성으로 전문서사관(篆文書寫官)의 임무를 수행한 뒤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어 1882년 대제학이 되어 회권(會圈)에 참여하였다. 비록 일생을 관직에서 보냈지만, 항상 청백한 것을 좋아하여 연꽃을 사랑한다는 '연설보 蓮說補'를 지어 자신의 뜻을 펼쳤다. 저서로는 '갑고 甲藁' 6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