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의 문신. 재연(在衍)의 아들로 재현(在顯)에게 입양되었다. 1880년(고종 19) 경과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수찬이 되었는데, 그 이전에 세자익위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 홍문관응교로서 민비의 장례를 준비하고 흥선대원군 하야에 반대하였으나, 섬에 유배된 박우현(朴遇賢)을 석방하라는 흥선대원군의 명령에 반대하였다. 민씨정권이 다시 수립되었지만, 등용되지 못하다가 1880년대 후반에야 이조참의,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우부승지가 되었다. 그뒤 관계에서 물러나 있다가 건양, 광무연간에 이르러 궁내부특진관, 봉상사제조, 장례원경 등에 임용되었다. 1902년 내부대신이 되어 의정 윤용선(尹容善) 등과 함께 이용익(李容翊)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다음해 10월까지 내부대신으로 재직하였지만, 의정 이근명(李根命)이 수령 임명을 주의하라는 자신의 말에도 불구하고 70여 자리를 두고 물의가 분분하자 파면할 것을 주청하였다가 면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