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치억(稚億). 아버지는 현령 원흥(源興)이며, 어머니는 안익중(安翊重)의 딸이다. 1872년(고종 9)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록(官錄), 도당록(都堂錄)에 오르고, 1879년에 사은 겸 동지정사(謝恩兼冬至正使) 인 윤자승(尹滋承)의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1885년에 전라좌도암행어사가 되었지만, 능주목사(綾州牧使) 김익성(金益成)의 국상이 실제와 많이 틀린다고 하여 중추(重推)를 당하였다. 그러나 2년 뒤에 다시 전라좌도암행어사로 나가 흥양(興陽)의 진결(陳結)폐단을 바로잡기도 하였다. 그뒤 내무부참의, 대사간, 이조참의를 순탄하게 천임하였지만, 신식제도에 어둡거나 불필요하다고 판단된 관리들이 대량 퇴직당한 갑오경장 이후에는 한동안 등용되지 못하였다. 수구파가 득세하였던 1898년 중추원의관이 된 뒤 서리대신사무, 비서승 겸 장례를 역임하였고, 또 함경도관찰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1899년 정종대왕을 추상존호(追上尊號)할 때 채제공(蔡濟恭)과 이이장(李○章)을 종묘에 배향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