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순칠(舜七). 호는 석호(石湖). 흥완군 정응(晸應)의 아들로, 대원군의 조카이며 서상조(徐相祖)의 사위이다. 1875년(고종 1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설서, 검열을 거쳐 1877년 동부승지에 이르렀다. 1880년 이조참판에 승임되고, 1884년 갑신정변 때에는 개화당(開化黨)내각의 병조판서가 되었고,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다. 1886년 홍문관제학이 되었고, 1891년 이조판서에 승임되었다. 1898년 홍문관학사에 이어 이듬해에는 궁내부대신으로 전임되었다. 이해 9월 완순군(完順君)에 봉작되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다. 1905년 정월 보빙사(報聘使)로 일본에 다녀오고, 1907년 육군부장(陸軍副將)에 임명된 뒤 승녕부총관(承寧府總管)이 되었다. 재임간 훈삼등일등태극장(勳三等一等太極章)을 비롯하여 대훈이화장(大勳李花章), 서성대수장(瑞星大綬章), 금척대수장(金尺大綬章)을 수여받았고, 일본정부로부터는 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과 국권피탈 후에 후작(侯爵)의 작위를 받았다. 또한, 1897년 설립된 한성은행(漢城銀行)의 주도역할을 하였으며, 1903년 다시 김종한(金宗漢), 이보응(李普應), 한상룡(韓相龍) 등과 함께 합자회사공립한성은행(合資會社公立漢城銀行)을 설립하여 1912년까지이 은행의 행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