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홍철주(洪澈周)
  • 풍산홍씨(豊山洪氏),  출생~사망 : 1834 ~ ?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백영(伯泳). 서울 출신. 의명(義命)의 손자로, 일모(一謨)의 아들이다. 1859년(철종 10) 진사로서 증광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66년(고종 3) 조정에서 탐학행위가 극악해진 지방의 간리(奸吏), 토호들을 특별히 염찰(廉察), 징치(懲治)하기 위하여 경기, 경상, 전라, 공충도(公忠道)에 암행어사를 일제히 파견하였다. 이때 공충도에 파견되어 백성들로부터 탐문하는 등 철저히 염찰하여 무단(武斷) 토호를 파악, 죄를 주고 수령 중 선치한 자와 실정한 자를 파악, 보고하였다. 그 공으로 1867년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1875년 안동부사로 있을 때 울산부에서 민란이 일어났는 바, 이는 유리(由吏) 김양서(金養舒)가 횡령한 공전(公錢)을 충당하기 위하여 울산부민들로부터 부당하게 5, 000냥을 거두어 들이자 이에 반발한 부민들이 일으킨 난이다. 안핵사(按○使)로 울산에 파견되어 난을 주도한 3인과 김양서를 목 베고, 난에 참여한 부민 및 이를 막지 못한 향리 등에게 도배(島配) 등의 죄를 주고, 김양서의 작간(作奸)에 대하여 지휘감독 책임을 물어 2명의 전 울산부사를 의금부에서 조사하게 하였다. 1876년 이조참의, 1877년 성균관대사성이 되었고, 예방승지를 거쳐 1881년 이조참판, 1883년 한성부판윤, 1884년 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해에 일어난 갑신정변이 실패한 직후 사대당 내각이 수립될 때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1885년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예조판서, 1886년 형조판서, 공조판서, 상호도감제조(上號都監提調)에 임명되었다. 1887년 3월 전보국총판이 되어 전선가설에 공을 세웠으며, 같은해 6월부터 1891년 3월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형조판서 를, 세 차례에 걸쳐 예조판서를 맡았다. 시호는 효헌(孝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