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해창(李海昌)
  • 전주이씨(全州李氏),  출생~사망 : 1865 ~ 1945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배언(拜言). 경기도 포천 출신. 경용(慶鎔)의 아들로 하전(夏銓)에게 입양되었으며, 수구파 홍종우(洪鍾宇)의 사위이다. 1879년(고종 16) 종친부참봉에 제수되고 1884년에는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가 되었다가 188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홍문관교리로서 남교교수(南校敎授)를 겸임하였다. 이듬해에는 사간원헌납을 비롯하여 총어영군사마(總御營軍司馬), 사헌부장령, 홍문관응교를 역임하고, 1891년에는 수정청도청(修正廳都廳)이 되어 '선원보략 璿源譜略'의 개찬(改撰)에 참여함과 동시에 종친부도정을 겸하였다. 이듬해에는 형조참의를 거쳐 우부승지, 사간원대사간에 승임되었다. 1893년에는 공조참의에 이어 예조참의에 전임되고 1894년에는 다시 대사간을 거쳐 종정사장(宗正司長)에 보임되었다. 1897년에는 봉상사부제조(奉常司副提調)에서 강화부윤으로 전임되고, 다음해에는 중추원의관에 이어 비서원승에 전임되었으며, 1904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그해 창산도정(昌山都正)에 이어 창산군(昌山君)으로 진봉(進封)됨과 동시에 종2품에 특자(特資)되어 유릉수릉관(裕陵守陵官)이 되었다. 1905년에는 정2품에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고 1907년에는 종1품에 올랐다. 재임중에 훈일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 대훈이화대수장(大勳李花大綬章)을 받았고, 국권강탈 후에는 일본정부로부터 후작의 작위를 받았다. 한편 재계에도 손을 뻗쳐 1923년부터 1928년까지 한성은행의 취체역에 종사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