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김세기(金世基)
  • 연안김씨(延安金氏),  출생~사망 : 1852 ~ 1908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대유(大有). 연흥부원군 제남(悌男)의 종손이다. 1874년 사마시를 거쳐 1882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85년에는 진주사(陳奏使) 민종묵(閔種默)을 수행하여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88년 성균관대사성, 1891년 사헌부대사헌을 지냈다. 1893년 개성부유수로 있을 때 개성부에서 민요가 일어났는데, 안핵사 박용원(朴用元)에 의하여 잠삼추장금(潛蔘推贓金)을 사용(私用)하는 등 그의 탐묵(貪墨)으로 말미암아 민란이 발생하였다고 탄핵받았으나 의정부 에서는 그 추장금이 공용(公用)으로 사용된 것이 확실하다면서 오히려 안핵사를 견책하였다. 이리하여, 개성유수 직에서는 물러났으나, 이듬해인 1894년 한성부판윤에 다시 임명되었다. 같은해 6월 민씨정권이 붕괴되고 개화파정권이 들어선 뒤 다시 개성부 민요와 관련, 문책을 받아 경상북도 영양현(英陽縣)에 유배되었다. 1895년 7월 유배에서 풀려나 1896년 중추원의관이 되었고, 이후 광무연간에 장례원경, 궁내부특진관, 비서원경, 시종원경, 전라남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905년 2월 전라남도관찰사로 재직할 때 전라남도순찰사 안종덕(安鍾悳)의 탄핵을 받아 관찰사 직에서 파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