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경희(敬熙). 서울 출신. 1875년(고종 12) 경과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직후 승정원가주서에 임명되었다. 1877년 수찬, 사서, 장령, 1878년 부응교, 1879년 형조참의, 병조참의, 1880년 부승지, 1881년 대사간, 1883년 대사성, 1884년 이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889년 예조참의, 1890년 형조참판, 병조참판, 1892년 한성부좌윤, 1893년 좌승지, 한성부우윤, 1900년 궁내부특진관, 1901년 장례원소경, 1902년 궁내부특진관을 거쳐 1906년 중추원찬의에 이르렀다.이 무렵부터 사회단체를 조직, 활동하였다. 1907년 3월 신기선(申箕善), 서상훈(徐相勛) 등과 함께 신구학문연구(新舊學問硏究)를 표방하는 대동학회(大東學會)를 조직, 부회장을 맡은 것이 그 중 하나이다. 그런데이 단체는 이토(伊藤博文) 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아 조직된 친일유림단체였다. 1908년에는 일본인을 고문으로 하며 '농상공(農商工)발달하여 생산력을 증진하게 하여 국가부강 기초를 작성함'을 목적으로 하는 제국실업회(帝國實業會)의 회장으로, 교육, 위생, 환난상구(患難相救)를 목적으로 하는 관진방회(觀鎭坊會)의 인사부장으로 각각 활동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찬의가 되어 친일활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