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의 문신. 일명 두석(斗錫). 제주 출신. 아버지는 종관(宗寬)이며, 어머니는 홍씨(洪氏)이다. 본래는 제주성 내에 거주하였으나 뒤에 중문(中文: 지금의 서귀포시 중문동)으로 이주하여 살았으며, 시에도 능하였다. 1894년(고종 31) 제주판관 재임시 제주에 흉년이 들자 봉록을 의연(義捐)하여 기민(飢民)들을 구제하였고, 1895년 대정군수 재직시에는 주민 강유석(姜瑜奭)과 송계홍(宋啓弘) 등이 난을 일으켜 갑오경장 후의 신제도실시에 반대하여 경무청(警務廳)을 파괴하자, 전 부사 김윤병(金潤柄)과 함께 관군을 인솔하여 이를 토벌하고 난을 진압하였다. 1901년에는 이른바 이재수(李在守)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는 천주교도인 대정군(大靜郡: 지금의 남제주군 대정읍)의 부이방(副吏房) 김옥돌(金玉乭)이 향장(鄕長) 오대현(吳大鉉)의 기처(妓妻)와 간음한 사건을 계기로 일이 확대되어 상무사원(商務社員)과 천주교도간에 충돌로 일어난 사건이다. 봉세관(捧稅官) 강봉헌(姜鳳憲)이 상무사의 대표격이었던 그를이 사건의 책임자로 조정에 무고하였기 때문에 대정군수직에서 파면되었다. 상무사는 그 성격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1901년 4월에 채구석, 오대현, 강우백 등 대정군민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겪어온 일본어민의 어장침투, 경래관(京來官)들의 탐학(貪虐), 봉세관의 남세(濫稅)와 일부 천주교도의 작폐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서로 단합하여 설립한 것인데, 외세를 배경으로 작폐를 일삼는 일부 천주교도들과는 충돌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상무사의 주도자이며 당시 대정군수 였던 그는 난이 진압되는 동안 관민측과 목사 사이를 오가며 유혈충돌과 난의 확산을 막고, 또 신부의 보호 등에 진력하였으나 프랑스의 압력으로 뒤에 억류되어 조사까지 받아야 하였다. 조사결과 아무런 혐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군수 직에서 파면되고 그뒤 3년간의 금고생활(禁錮生活)을 하게 되었다. 그 뒤 중문에 거주하면서 '천제연폭포수(天帝淵瀑布水)를 끌어 관개(灌漑)에 사용할 수 없을까○' 하는 궁리 끝에 1905년부터 3년간 지세를 답사하고 물길을 열어 성천봉(星川峯) 아래로 물을 대어 5만여평의 논을 개간하였다. 1957년 8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서귀포시 중문동 천제연에 기념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