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의 문신. 성택(星澤)의 아들로 희순(熙淳)에게 입양되었다. 홍한주(洪翰周)의 외손이다. 1872년(고종 9) 경과정시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이듬해에는 김홍집(金弘集), 김영철(金永哲), 이희원(李喜元) 등과 함께 권무직인 한권(翰圈)에 나아갔다. 1875년 부사과가 되어 그해 4월 시행된 문과의 3소시관(三所試官)을 지내기도 하였다. 1876년에는 김홍집, 이교하(李敎夏), 오익영(吳益泳) 등과 함께 본관록(本館錄)과 도당록(都堂錄)을 거친 다음 1879년에는 승정원의 동부승지로 특별제수되었다. 1884년 11월에는 이조참의가 되었으며, 1890년에는 성균관대사성의 직에 올랐다. 1894년 갑오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해에는 관서 지방에 속한 성천부사로 재임하였다. 그러나 당시 관서 지방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농민운동으로 인하여 수령직에서 파출(罷黜)되었다가 뒤에 복직되기도 하였다. 1897년 2월 비서승 겸 장례(○書丞兼掌禮)가 되고, 그해 3월 시종원시종이 되었으며, 이어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됨과 동시에 칙임관 4등에 올랐다. 같은해 8월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친 뒤에는 태복사장(太僕司長)을 거쳐 경모궁제조(景慕宮提調)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다시 경효전제조가 되었다. 같은해 10월 영희전제조(永禧殿提調)에 임명되었다. 1901년에는 종묘서제조가 되고, 1907년에는 다시 경효전제조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봉상사제조(奉常司提調)가 되었다. 1908년에는 장례원소경과 홍릉제조를 지냈다. 1907년에는 재차 영희전제조가 되고 칙임관4등에 올랐다. 같은해 1월에는 기로소 비서장이 되고, 그해 5월에는 홍릉제조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