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의 문신. 교관 백희(百熙)의 아들이다. 1885년(고종 2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886년 승정원의 주서에 천거되고, 이듬해 홍문관의 본관록(本館錄), 도당록(都堂錄)에 올랐다. 1890년 규장각의 직각권(直閣圈)에 올라 시강원사서를 지내고, 이듬해 시강원의 필서, 문학 등을 지냈으며, 효모전작헌례(孝慕殿酌獻禮) 때에는 상례(相禮)로 참여하여 가자(加資)되었다. 1892년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가 1907년 성균관 장에 임명되었다. 이해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통감부가 박제순(朴齊純) 내각의 교체를 단행하고, 이완용(李完用)으로 하여금 새 내각을 조직하도록 하였을 때 송병준(宋秉畯) 등과 함께 입각하여 내부대신이 되었다. 새 내각의 일원으로 순종이 즉위하자 훈1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을 수여받고 일본의 훈1등욱일동화대수장(勳一等旭日桐花大綬章)도 받았다. 이듬해 탁지부대신에 임명되어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지시에 따라 각 지방의 일본 소유용지로 된 군용지, 철도용지 등을 면세하도록 하는 한편, 의병에게 처단당한 자의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하였고, 농공채권(農工債券)발행 때 정부에서 그 원리금에 대한 지급보증을 하도록 하였다. 주합루(宙合樓)에서 부통감 등과 순종 접견 때에 '수목이 깊고 깊으니 여름날이 춥구나. 연꽃이 연못 위에 피어 난간이 푸르다. 그림 속 경치는 실로 기묘하게 빼어난데, 선한 천안(天顔)이 웃음띠고 보는구나. '라고 읊었다. 국권강탈 이후에는 일본 정부에 의하여 자작(子爵)이 주어졌고, 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