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윤덕영(尹德榮)
  • 해평윤씨(海平尹氏),  출생~사망 : 1873 ~ 1940
조선 말기의 문신, 친일파. 영돈령부사 철구(徹求)의 아들이며, 택영(澤榮)의 형으로 순종의 비(妃)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삼촌이다. 1894년(고종 31) 진사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비서감우비서랑(○書監右○書郞)이 되었다. 비서랑의 자격으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원이 되어 일본에 다녀왔고, 1896년 내각총리대신비서관 겸 내각참서관, 경연원시독관(經筵院侍讀官)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만장서사관(輓章書寫官)에 임명되었다. 1897년 중추원 3등의관에 이어 바로 2등의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에는 농상공부 협판참서관에 임명되었다. 1899년에는 내부지방국장, 1901년 경기관찰사에 임명되었고 궁내부특진관을 겸임하였다. 이해에 황해도관찰사로 전임하였고, 일본이 1898년 경부선철도부설권을 획득한 지 3년 뒤인 1902년 착공을 시작하자 철도원부총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지계아문부총재(地契衙門副總裁)에, 1904년에는 봉상사제조(奉尙司提調), 비서원경(○書院卿), 시강원첨사(侍講院詹事),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의정부참찬, 홍문관학사, 평리원재판장, 의정부찬정을 역임하였다. 1905년 교육사업에 관계하여 법학교를 설치한 바도 있다. 1908년 시종원경(侍從院卿)이 되었고, 1910년 국권상실 때에 궁내부대신 인 민병석(閔丙奭)과 함께 이완용(李完用)의 합방불가피 역설에 동의해줄 것을 요청받고 주저하다가 데라우치(寺內正毅)의 협박, 회유에 동의하여 그 조인에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국권상실 후 황실과 황족에 대한 대우와 친일분자에 대한 행상(行賞)을 실시하였을 때 일본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