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무신. 어려서부터 무예에 능하여 '무동(武童)'이란 별칭을 받았다. 약관으로 무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수양대군이 뜻을 품고 은밀히 무사를 모으자 그 휘하에 들어가서 심복이 되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자신의 집권에 장애가 되는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기 위하여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수양대군을 도와 공을 세워 정난공신 3등에 녹훈되고, 복성군(福城君)에 봉해졌다. 1455년 단종복위운동인 사육신사건이 일어나자, 그 당여들을 검거하는 데 앞장섰다. 그 공으로 영풍군(永豊君) 천(○: 세종의 아들)의 저택과 하위지(河緯地)의 처와 여식을 노비로 하사받았다. 1461년에 명나라 황태후가 죽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진위 겸 진향부사(陳慰兼進香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무예로써 이름을 떨쳤으나, 입신을 위하여 의롭지 못한 일을 많이 하였다. 시호는 양정(襄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