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무신. 자는 자겸(子謙). 일수(逸修)의 아들이다. 1757년(영조 33) 문음(門蔭)으로 선전관이 되었고, 2년 후에 사복시내승(司僕寺內乘)으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1763년 훈련원정으로 일본 통신사를 호종하여 일본에 다녀왔다. 귀국 후 방어사, 겸사복장(兼司僕將)을 거쳐 1768년 충청수사에 임명되었다. 그 다음해에 전라병사가 되었으나 부임 도중 전라감사 김상익(金相翊)의 속예(屬隷)의 불법을 다스리다가 김상익의 무고로 파직당하였다. 곧 승지를 거쳐 함경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이어서 수군통제사가 되었으나 전선(戰船)의 전복으로 일시 삼수부에 유배되었다. 1783년(정조 7) 총융사(摠戎使)로 재기용되었고, 훈련도감 중군, 좌포도대장, 어영대장을 거쳐 금위대장이 되었다. 이때 금위영이 나례도감(儺禮都監)과 함께 주악(奏樂)을 연습하다가 화포를 잘못 쏘아 궁궐에 불이 나게 되자 책임을 물어 추고(推考)당하고 파직되었다. 다시 우포도대장으로 기용된 후 금위대장, 훈련대장, 어영대장, 주사대장(舟師大將) 등을 지냈는데, 그의 5군영 지휘관 역임은 통산 총융사 4번, 어영대장 7번, 훈련대장 3번, 금위대장 7번으로서 정조 때의 군권을 장악한 핵심 인물이었다. 그 사이에 남항(南行)출신의 무관 임명문제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하였으며, 직사(職事)처리의 잘못으로 강화부 군졸로 충군(充軍) 또는 전리(田里)에 방축되기도 하였다. 그뒤 한성판윤을 거쳐 1802년(순조 2)에 훈련대장으로 죽었다. 체격이 크고 성품이 너그러워 군졸의 원성을 산 바가 없어 당시 사람들은 그를 복장(福將)이라 불렀다고 하며, 글씨에도 능하여 대자(大字)를 잘 썼다고 한다. 시호는 무익(武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