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광영(李光英)
  • 전주이씨(全州李氏),  출생~사망 : 1598 ~ 1657
조선 후기의 무신. 자는 영중(榮仲).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의 후손으로, 부원수 빈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으며, 임진왜란 때는 벼슬도 없으면서 아버지를 따라 행재(行在)에 나갔다. 이때 종신(從臣)의 자제들로서 부형을 모시고 온 자는 유독 그 한 사람뿐이었다. 이에 선조는 포상을 하였는데, 상례의 격을 벗어나 직접 급제시켜 벼슬을 주었다. 또, 아버지를 따라 진해로 남하하면서 적과 싸워 전공을 세웠다. 적병이 물러나고 서울로 돌아와 여러 관직을 거쳐, 경상, 전라도의 병수사(兵水使)를 역임하였다. 이때 광해군의 총애를 받던 김상궁에게 가까운 친족이 있어 권세를 믿고 법을 어겼다. 김상궁은 편지로써 완만하고 부드럽게 부탁하였고, 한편 광해군도 밀지를 내렸는데, 그는 이것이 정당하지 않았기에 찢어버리고 나아가 형을 받기도 하였다.이 때문에 광해군의 미움을 몹시 받다가, 서궁(西宮)에 문안하였던 일과 이이첨(李爾瞻)의 죄에 연루되어 마침내 진도로 유배되었다. 인조반정 후 연이어 장흥, 양주 두 읍의 수령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곧 이어 강화부윤으로 임명되었다. 광해군이 강화도로 축출됨에 따라 조정에서 특별히 그를 택한 것이었다. 그는 부임한 즉시 몸소 광해군의 거소를 자세히 살피고 유배생활의 어려움을 물어보는 등 너그럽게 하고 음식과 의복을 풍부히 하며 깨끗하게 보살폈다. 광해군은 괴이하게 여기고 새로 부임하여온 부윤이 누구인가를 물었는데, 이광영이라는 것을 알고나서는 한숨을 쉬면서 말하기를 '이와같이 착한 사람을 일찍이 내가 파면하고 배척하였으니 금일의 재앙은 마땅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