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무신. 자는 선보(善甫). 통제사 성뢰(聖賚)의 아들이다. 1699년(숙종 25)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뒤 덕원부사, 삼화부사 등을 거치고 각 병사를 역임하였다. 1728년(영조 4) 청주에서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당시 마병별장(馬兵別將)으로 궁성을 지키고 있던 그는 4도도순무사 인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을 따라 출정하였다. 진위현에서 김성옥(金聲玉)의 목을 베고 승리하였다. 안성에 이르자 그에게 회령부사가 제수되었으나, 그가 부임하기를 주저하자 순무사가 상계(上啓)하여 유임하도록 하였다. 다시 청룡산에서 주장 박종원(朴宗元)의 목을 베고 설동린(薛同麟)을 사로잡은 뒤에, 죽산에서 두목인 이인좌를 사로잡는 공을 세웠다. 이에 분무공신(奮武功臣)3등에 녹훈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완춘군(完春君)에 봉하여졌다. 그뒤 포도대장, 평안도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 등을 지냈다. 시호는 충양(忠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