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고아가 되었으나 자립하여 학문수양에 전력하였다. 24세에 장군의 후손답게 무과에 급제하였다. 1697년(숙종 23) 무관으로 윤지선(尹趾善)의 천거를 받은 바 있으며, 1711년 삼도통제사가 되었다. 영남에 있을 때 큰 가뭄이 들자 백성들의 구휼에 전력을 다했으며, 길주에 있을 때도 가뭄의 피해로 백성들이 곤경에 처하자, 이들의 기아를 척결하는 데 공을 세웠다. 1711년 통제사로 있을 당시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기강을 바로잡는 일에 힘쓰는 한편 현의 창고를 열어 서민들을 도와주었으므로, 군민(軍民)이 모두 힘을 합쳐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한 비석을 세웠다. 한편 글씨에도 뛰어나 초서, 예서를 잘 썼다.
일찍이 고아가 되었으나 자립하여 학문수양에 전력하였다. 24세에 장군의 후손답게 무과에 급제하였다. 1697년(숙종 23) 무관으로 윤지선(尹趾善)의 천거를 받은 바 있으며, 1711년 삼도통제사가 되었다. 영남에 있을 때 큰 가뭄이 들자 백성들의 구휼에 전력을 다했으며, 길주에 있을 때도 가뭄의 피해로 백성들이 곤경에 처하자, 이들의 기아를 척결하는 데 공을 세웠다. 1711년 통제사로 있을 당시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기강을 바로잡는 일에 힘쓰는 한편 현의 창고를 열어 서민들을 도와주었으므로, 군민(軍民)이 모두 힘을 합쳐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한 비석을 세웠다. 한편 글씨에도 뛰어나 초서, 예서를 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