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신광하(申光夏)
  • 평산신씨(平山申氏),  출생~사망 : 1688 ~ 1736
조선 후기의 무신. 자는 사회(士晦).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여철(汝哲)의 손자이며,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환의 아들이다. 20세가 넘어 장신(將臣)의 자제로 조정에 천거되어 선전관에 제수되었으며, 1712년(숙종 38)에 정시무과(庭試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에 임명되었다. 그뒤 훈련도감천총(訓鍊都監千摠)을 거쳐 1716년에 우림위장(羽林衛將)으로 승진되었다. 그뒤 춘천과 장단의 방어사(防禦使)를 거쳐 충청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된 뒤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올라 경기도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제사에 제수되었다가 1722년(경종 2)에 내직으로 옮겨 금군별장(禁軍別將)이 되었다. 그 사이에 황해도, 평안도의 병마절도사와 정주, 안악, 영변의 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다가 1724년에 다시 영변군수에 임명되자 비로소 부임하였다. 영조가 즉위하자 총융사, 도총부총관, 포도대장, 훈련원도정 등에 발탁되었다가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1727년(영조 3)에 어영대장(御營大將)으로 전직하였는데 이해에 정미환국이 단행되어 소론의 공격을 받게 되자 스스로 물러났다. 이듬해에 다시 서용(敍用)되어 총융사에 임명되었고, 1729년에 한성부좌윤을 거쳐 1730년에 수원부사로 부임하였으나 암행어사의 서계(書啓)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여 중앙조정의 경제시책을 논하다가 대사간 이춘제(李春○)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733년에 포도대장에 임명되었다가 병조판서 조상경(趙尙絅)과 사소한 일로 알력이 생겨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다시 파직되었다. 총관과 포도대장을 여러 차례 지냈는데, 1736년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곧 죽었다. 평소에 과묵하여 가까이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