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여발(李汝發)
  • 한산이씨(韓山李氏),  출생~사망 : 1621 ~ 1683
조선 후기의 무신. 자는 군실(君實). 정사공신(靖社功臣) 한천군(韓川君) 의배(義培)의 손자이다. 1651년(효종 2) 무과에 급제한 뒤 비변사낭관, 도총부도사, 경력을 거쳐, 1653년 숙천부사가 되어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살피고 선정을 베풀었다. 이어 만포첨사, 영흥부사, 장단방어사, 충청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회령부사에 제수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위계에 오르고 한흥군(韓興君)에 봉해졌다. 회령은 북방의 거진(巨鎭)으로서 야인들과 가까이 있어 서로 거래하는 시장이 있었는데 그들이 내왕에 하등 제한을 두지 않았으므로 피해가 많았다. 이때 그는 부임하여 출입인원을 320명 이내로 하고 체류일수를 20일 이내로 규정하여 엄격한 통제를 가하였으므로 많은 피해를 덜게 되었다. 1660년(현종 1) 삼도통제사에 제수되고 이어 함경도병마절도사, 훈련도정, 포도대장, 공조, 병조의 참판 등을 지내고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나갔는데, 성을 수축하고 병기를 정비하며 군사들에게 사예(射藝)를 훈련시켜 북방수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뒤 훈련대장 이완(李浣)이 면직되자 상국(相國) 정태화(鄭太和)의 천거로 그 후임이 되었으며 이어 어영대장, 한성부의 좌윤, 우윤, 비변사제조, 포도대장, 총융사, 수원부사 등을 지내고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과묵하고 웃는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으며, 사졸을 따뜻이 위무하고 제교(諸校)를 예의로 대하였으므로 모두 그 덕을 우러러 그에게 충실하였다. 정태화, 여성재(呂聖齋) 등과 가까이 지냈다. 시호는 정익(貞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