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무신. 자는 군망(君望).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6대손이다. 어려서부터 몸집이 크고 뼈대가 굵어 기골이 의연하였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복시(覆試)에 나아갔으나 이로움〔利〕이 없으매 탄식하기를, '어버이가 늙으시고 가세 또한 가난하니, 이로써 이름을 떨치기 어렵다.'고 하여 무예를 닦아 1706년(숙종 32)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제수되고 비변사낭관을 겸임하였다. 내외의 여러 벼슬을 거쳐 경상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724년(경종 4) 노론인 이이명(李○命)의 일파라 하여 삭직되었다가, 영조가 즉위하자 다시 기용되어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고, 풍비(風痺)로 54세에 세상을 떠났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으며, 남의 위급함이 있으면 급히 도와주었다. 평생에 재산을 모르고 항상 검소한 생활을 하니 모두가 나라의 그릇(國器)이라 칭송하였다. 일찍이 판서 권상유(權尙遊), 김진규(金鎭奎)와 지우가 깊었다. 글씨를 잘 써서 당세에 이름을 떨쳤다. 작품으로는 글씨로 이재항서첩(李載恒書帖)이 목판으로 인간되어 전한다.